3. 싯다르타가 살았던 시대적 배경
서기전 1500년경 서북인도의 펀자브 지방에 침입한 아리아족은 서서히 동남으로 이주하여 갠지스 강 상류에 정착했고, 서기전 9세기 무렵까지 베다문화를 형성했다. 이후 다시 동쪽의 중류 지방으로 이주하여 원주민과의 혼혈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그 사회의 구성과 문화에는 새로운 변화가 나타났다. 한마디로 붓다의 시대는 격변의 시대였다. 이 격변을 결정지운 가장 결정적 사건은 역시 철기의 보급이다. 웃따르 쁘라데쉬-비하르 주 지역은 강우량이 풍부한 대 평원이다. 이 지역은 본시 울창한 숲으로 덮여있었으며 철제로 만들어진 연장이 없이는 개간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아리아족의 동진(東進)과 더불어 철기가 보급되면서 울창한 밀림은 비옥한 농토로 개간되기 시작한다. 갠지스강 유역으로 거대한 농경지가 무제한으로 펼쳐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농경문화의 하부구조를 바탕으로 도시국가들이 생겨났던 것이다. 상공업과 무역의 발달, 화폐의 유통으로 인한 시장경제의 발달은 도시상인을 주류로 하는 바이샤계급의 급성장을 야기했다.
종래의 부족적 계급제도는 무너져 갔고, 이와 동시에 소도시를 중심으로 점차 군소국가가 구성되어 귀족정치나 공화제적 정치가 실행되었으며, 이런 국가들은 이윽고 국왕이 통치하는 대국으로 병합되기에 이르렀다. 잦은 전쟁을 통한 강력한 왕권의 출현은 크샤트리아 계급의 세력을 신장시켰다. 이 두 계급은 서로 제휴하여 브라만 계급의 제식주의 전통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예를 들어 불교가 전통적인 카스트를 부정하고 브라만교의 제식주의를 거부하며, 연기에 의거한 이성적 사유와 카르마에 대한 개인적 실존의 책임을 강조하는 것은 모두 새로 등장한 바이샤계급과 크샤트리아 계급의 윤리의식과 상부하는 것이다. 초기불교승단의 재정적 후원이 대체로 바이샤(불전에서는 ‘장자[長者]’들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며, 붓다의 전도를 안전하게 보호해준 사람들은 주로 크샤트리아 계급인 왕족들이라는 사실이 이러한 역사적 상황을 잘 설명해주는 것이다.
도시국가의 성쇠에 따라, 역사의 대세는 혈연중심의 씨족 공동체에서 지연중심의 부족국가로, 그리고 순수하게 영토중심의 대국가 체제로 이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붓다시대에 16개의 도시국가들이 존재했다고 하는데, 이들 국가들은 결국 코살라(Kosala), 밤사(Vamsa), 마가다(Magadha), 아반띠(Avanti)의 4대국으로 통합되었다. 그리고 결국에는 코살라를 정복한 마가다와 아반띠 두 나라의 대립상태로 유지되다가 최종적으로 마가다 통일왕조의 출현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경제적 지위의 향상과 더불어 종래의 고정적 사상이나 종교에 만족할 수 없었던 토착부족이나 혼혈화 된 새로운 부족의 지위도 향상되었다. 결국 기존의 계급제도와 종교의 권위가 실추된 시대적 상황에서 등장한 우파니샤드 철학을 비롯한 신흥종교가 또는 자유로운 사상을 품은 사람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특히 갠지스 강 중류의 마가다와 코살라라는 두 대국을 중심으로 많은 사상가들이 배출되었다. 이들 혁신적인 자유사상가들은 사문(沙門:노력하는 사람)이라 불렸다.
사문은 팔리어 'samana'에서 유래하는 음사어로서 '노력하는 사람', '도인'을 의미한다. 비구(比丘)와 같은 뜻으로 쓰기도 하지만 원래 사문은 고대 인도에서 반(反)베다적이고 반(反)브라만적인 출가 수행자를 가리켰다. 그들은 종래의 전통적인 정신원리인 베다 성전이나 사제인 바라문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비전통적인 사상가였으며, 이런 의미에서 자유사상가라고 말할 수 있다. 사상적으로 보면 이들은 베다 종교의 제식(祭式) 만능주의에 반대하고, 극단적인 유물론자들도 있지만 대체로 업(業)과 윤회의 사상에 입각하여 고(苦)의 세계인 윤회로부터 벗어나 해탈을 얻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불교에서도 비구를 사문이라 칭하는 이유는 사문들의 특징이 출가주의를 지향한 점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불교 경전에서 전하는 육사외도(六師外道: Sad-darsama)가 당시의 대표적인 사문들이다.
육사외도란 석가 당시 인도 지방에서 가장 세력이 컸던 6인의 철학자·종교가의 유파를 말한다. 6파철학이라고도 한다. 인도 브라만교에서 나름 정통으로 인정하는 철학의 대(大)유파 6종이다. 《베다》 문명에서 기인(起因)하는 인도 사상계는 《우파니샤드》 철학을 탄생시켜 인도종교의 기조를 형성하였다. 거기에서 인생관·세계관·우주관 등 여러 사상·학설이 태동하여 이른바 6대 철학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이 학설들은 브라만의 근본 경전인 《베다》 《우파니샤드》 등과 서로 용납될 수 없는 점이 있으므로 외도(外道)라는 말이 붙여졌다. 더군다나 특히 불교 측에서 나중에 붙인 호칭임을 유의해야 할 것이다.
① 푸라나카사파[富蘭那迦葉]: 선악의 행위와 그 보응을 부정하는 도덕부정론자다. ② 마칼리고살라[末伽梨拘梨子]: 운명론 내지는 결정론자라고 할 것이며, 불교에서 말하는 이른바 사명외도(邪命外道)다. ③ 산자야벨라지푸타[刪耶毘羅子]: 회의론자 또는 불가지론자(不可知論者)로 괴변론자로도 전해진다. 목건련과 사리불도 원래 산자야의 제자였다. ④ 아시타케사캄발라[阿耆多翅舍欽婆羅]: 유물론자로서 쾌락설을 주장하였다. ⑤ 필구타카자야나[迦羅鳩馱迦延]: 유물론적인 주장을 펼쳤다고 한다. ⑥ 니간타나타푸타[尼咤若提子]: 자이나교(Jainism; 를 일으킨 석가모니에 비길만한 당대의 라이벌이다. 기나교(耆那敎) 등이다. 이들 육사(六師)는 한결같이 《베다》의 권위를 부인하고 브라만교에 반항하였다. 그들은 신흥도시의 왕후·귀족·부호들의 정치적·경제적 원조 밑에 활약하였다. 이들 각 유파의 형성은 그 기원·성립연대가 다른데, 서기전 5세기~서기전 3세기 사이로 추정되고 있다.
불교의 창시자로 여겨지는 석가모니도 그런 사문들 중의 한 사람에 불과 했었던 것이다. 석가모니를 추앙하고 실질적으로 불교를 융성시킨 인물은 인도 최초의 통일 왕국을 이룩한 아소카 왕이라고 할 것이다. 예수님에게 사도 바울(Paul)이 있었다면, 석가모니 부처님에게는 아소카 왕이 있었던 것이다.
Vedism
답글삭제서기전 1500년경 이란 지역에서 인도로 들어온 고대 인도유럽어족의 종교.베다교라는 이름은 베다라고 알려진 성전(聖典)에서 유래한다.
베다교에 대해 알 수 있는 통로는 현존하는 경전과 입문식(우파나야나), 가내제의(야지냐) 등과 같이 현대 힌두교의 틀 안에서 계속 거행되는 의례에 있다. 최초의 베다교는 초기 이란 민족과 동일한 신화적 인물을 섬기고 '소마'라는 식물에서 짜낸 액체를 신성한 공물로 사용하는 의례를 거행하는 등 다른 인도유럽어족과 상당한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내적으로 진전이 이루어지는 상태에 토착적 요소가 가미되면서 베다교는 계속 발전했다. 베다교가 고전 힌두교에 종교적 주도권을 내주게 된 시기를 말할 수는 없지만 서기전 5세기부터 베다파의 문학활동이 감소되며 대략 이 무렵부터 힌두교 특성을 지닌 경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베다교의 특징은 제의의 효험 및 대우주와 소우주의 조화에 대한 믿음이다. 우주는 항상 혼돈에 의해 파괴될 수 있는 위험한 상태에 있다고 생각되며, 인간은 제의를 거행하고 신에게 원기를 돋우는 소마주를 마심으로써 세계를 계속 유지시키는 데 기여한다 (소마). 제의는 계속 복잡해졌고, 실수는 더욱 정성스럽게 속죄해야 했기 때문에 점차 사제계급이 지배적인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브라만(성직자)·크샤트리아(지배자)·바이샤(상인)·수드라(非아리아인 노예)라는 4계급, 즉 4바르나로 이루어진 베다교 사회의 기본 계층은 후대 힌두교에서도 대개 존속되었다.
베다교 신전에 모시는 신들은 언제나 분명하게 묘사되지 않으며 서로 통합되는 경향이 있다. 대부분의 신들은 남성으로 생각되었으며 비의 신 인드라, 불의 신 아그니처럼 하늘이나 다른 자연현상과 연관되어 있다. 고전 힌두교의 중요한 신인 비슈누와 시바(또는 루드라)는 베다교에서 비교적 중요하지 않은 신으로 취급되었다. 후대 인도 종교의 대표적인 개념인 윤회와 업에 대한 믿음은 베다 성전에서는 보이지 않는 듯하다.
Upanishad (산)Upanisad
답글삭제('스승 가까이에 다가 앉는다'라는 뜻).
가장 오래된 힌두 경전인 베다를 운문과 산문으로 설명한 철학적 문헌들.
현재 108가지 정도 알려져 있는 우파니샤드에는 일찍이 BC 1000~600년경에 크게 활약했던 일련의 힌두 스승들과 성현들의 사상들이 기록되어 있다. 후기 인도 철학의 많은 부분이 이 문헌에 기반을 두었다. 우파니샤드는 베다 전통의 마지막 단계를 대표하기 때문에 이것에 기반을 둔 가르침들을 베단타(Vednta : 산스크리트로 '베다의 결론'이라는 뜻)라고 부른다. 초기의 우파니샤드는 각 베다서의 브라흐마나(Brahmana : 주석서)의 일부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우파니샤드는 철학적·신비적 문제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고 베다의 신들과 제사의례에 관한 관심이 옅어지면서 브라흐마나와 분리되었다.
우파니샤드는 실재의 본성에 특별한 관심을 두고 있다. 최고의 유일한 존재에 대한 관념이 형성되고 있으며, 지식은 그것과 재결합하는 데 있어서 직접적 수단으로 중시된다. 일부 우파니샤드에서 보이는 범아일여(梵我一如) 사상은 모든 힌두 사상의 가장 중요한 요소를 이룬다. 〈카타 우파니샤드 Katha Upanishad〉에서는 죽음의 신 야마를 찾아간 나치케타스의 이야기를 통해 도덕성과 영원한 삶의 본질에 관해 언급했다. 그 외의 주제로는 윤회와 생성의 인과율이 있다. 우파니샤드는 19세기 초 유럽에서 2, 3차 번역본까지 나와 상당수의 사상가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고, 특히 독일에서 그 영향이 두드러졌다.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사상을 형성하는 데 있어 우파니샤드의 사상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