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월 30일 수요일

(2) 금강경의 핵심


 (2) 금강경의 핵심

〈금강경〉의 경문은 처음 '여시아문'(如是我聞: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부터 '과보역불가사의'(果報亦不可思議:과보도 또한 불가사의하다)까지가 전반부에 해당하고, 그 뒤인 '이시수보리백불언'(爾時須菩提白佛言:그때에 수보리가 붓다에게 말하기를)부터 경의 끝에 이르기까지가 후반부에 해당된다. 그런데 역대의 〈금강경〉주석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경문의 전반부와 후반부 경문의 어구와 내용은 현저하게 다르다고 한다. 승조는 경의 전반부에서는 중생공(衆生空)이 설해졌고, 후반부에서 설법공(說法空)이 설해졌다고 했다. 지의와 길장은 이를 중설중언(重說重言)으로 간주하고, 전반은 전회중(前會衆)을 위한 것이요 후반은 후회중(後會衆)을 위한 것이며, 전반은 연(緣)을 진(盡)한 것이요 후반은 관(觀)을 진(盡)한 것이라 했다. 전반부는 부처님이 근기(根器: 불교의 이해 수준)가 예리한 사람들을 위하여 설한 것이고, 후반부는 나중에 모인 근기가 둔한 사람들을 위하여 설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논의가 결국 금강경이 보는 책이 아니라 듣는 음악이요 시라는 그 원초적 성격과, 그리고 문헌 비평상 간파될 수 있는 구전 문학 편집구도의 특이성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구차한 논설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금강경〉은 하나의 테마를 계속적으로 변주하고 전개해간 하나의 악곡에 비유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금강경의 주제는 “세존이시여! 선남자 선녀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냈으면, 마땅히 어떻게 살아야할 것이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 하오리까?[世尊善男子善女人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하니는 應云何住云何降伏其心]”라는 장로 수보리의 질문에 대한 석가모니의 대답이다.

그에 답하신 부처님의 말씀으로 바로 ‘머무는 곳이 없이 그 마음을 낼지라[應無所住하야 而生其心이니라]’ 이 한마디라 볼 수가 있을 것이다. 이 구절은 그 유명한 중국선의 실제 개조(開祖)라 할 수 있는 역사적 인물인 혜능이 출가를 결심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 〈금강경〉의 핵심적인 구절이다.

‘만약 보살이 아상이나 인상이나 중생상이나 수자상이 있으면 곧 보살이 아니다. [若菩薩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하면 卽非菩薩이니라]’는 그 말씀을 하기 위한 말머리요, ‘무릇 있는 바의 형상이 모두 허망한 것이니, 만약 모든 형상이 형상이 아님을 보면 곧 여래를 보리라. [凡所有相皆是虛妄이니 若見諸相非相하면 卽見如來니라.]’는 그 말씀의 몸이요, ‘이른바 불법이라고 하는 것은 곧 불법이 아닌 것이다. [所謂佛法者卽非佛法이니라]’라는 것은 그 말씀의 끝맺음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수보리의 맞장구인 ‘여래께서 설하신 바의 법은 모두 취할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고, 법도 아니며 법이 아닌 것도 아니기 때문이오이다[如來所說法皆不可取不可說이며 非法이며 非非法]’라는 구절로 금강경의 주제는 축약해 볼 수가 있는 것이다. 그 외의 〈금강경〉을 이루고 있는 논설은 위 주제의 다양한 변주와 전개에 불과하다고 감히 말해 볼 수 있을 것이다
.
내가 이해한 바로 금강경의 가르침은 인간의 인식의 틀인 ‘상(相)'과 사유의 도구인 ‘언어’ 자체가 법을 온전히 담아낼 그릇이 되지 못한다는 말이다. ‘비법비비법(非法非非法)’이란 ‘말하여도 그것이 곧 법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법을 담기는 했으므로 법이 (아예) 아닌 것은 아니다’라는 식으로 이해해도 온전히 틀리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노자도덕경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道’로 격의(格義)하여 이해해도 그르다 할 수 없다. 그리고 이천년 가까운 후대이긴 하지만 이러한 상(相)에 대한 이해는 서양 쪽의 철학에서도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의 우상타파론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20세기에 들어서는「언어철학」의 사조아래 심층적으로 논의된 것이다.

댓글 1개:

  1. 나는 수보리가 말한 [如來所說法은 皆不可取며 不可說이며 非法이며 非非法]을 ‘여래께서 법을 설하신 것은 모두 (법이라는 것이) 취할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어 (엄밀히 따지면) 법이 아닌 것인데(온전히 나타낸 것이 아닌 것인데), (그렇다고) 법이 (아예) 아닌 것 또한 아니옵니다.’라고 번역한다. 그래야 여래의 설법이 이른바 허망한 공염불이라는 착각과 혼란에 빠지게 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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